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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로 세계역사에 남은 치명적인 항쟁 TOP 9

게으른토끼 2016. 11. 24. 15:59

학살로 세계역사에 남은 치명적인 항쟁 TOP 10


▶ 학살로 세계역사에 남은 치명적인 항쟁 TOP 9

일반적으로, 잔인한 또는 억압적인 정부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은 행동으로 권리와 자유를 얻기위한 투쟁을 한다 

이것이 항거이고 항쟁이고 봉기, 혁명의 시작이다.


하지만 국가나 지배계층의 항쟁에 대한 응답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가끔 뜻을 이루고 평화적으로 자유와 권리를 얻기도 하지만 , 정부의 입장은 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피를 부르고 끔찍한 결과를 부른다.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인 항거와 항쟁을 9개를 소개한다.


★ 8888 반란


버마(현 미얀마)에서 1988년 8월 8일에 랑군(양곤)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500,000명의 사람들이 일으킨 반군부 민중항쟁이다.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으나, 500,000 사람들이 양곤, 미얀마의 수도로 진격했을 때, 1988년 평화로운 시위를 국가평화발전위원회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새로운 군부의 진압으로 시민, 대학생, 승려 등을 포함 3,000 명 이상이 죽었다. 결국 8888 민중항쟁은 1988년 9월 18일 종료됐다.


★ 3 · 1 운동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 루마니아 농민 반란


루마니아에서는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도시 지역에서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지만 농촌의 생활 수준은 악화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의 불만이 증가하였고 1888년과 1907년에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907년 3월부터 남부의 절반에 폭동이 가담했습니다. 정부는 이폭동을 제압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유당은 1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폭동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11,000 명이 사망했습니다.


★ "피의 주(The Bloody Week)"


1871년 봄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창설하려는파리 시민 절반이 참가한 선거를 통하여 1871년 3월 28일 파리 코뮌(Commune of Paris)이 구성되었다. 다양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이 결합된 파리 코뮌은 프로이센에 계속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며 도시의 자치, 공화정치를 지지했다. 하지만 베르사유로 도망쳤던 정부군이 다시 되돌아와 파리를 공격하면서 1871년 5월 21일부터 5월 27일까지 피의 일주일(The Bloody Week, La Semaine Sanglante)로 불리는 기간 동안 정부군과 코뮌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20,000명의  민간인이 총격에 사망, 체포,  정부 군인 750명이 사망했다.


★ 228 대학살



1947년 2월 27일 밤 일제패망후 대만에 주둔한 장제스(蔣介石) 의중화민국 국민혁명군 때에 불법담배단속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軍)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다.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약 3만 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 타이완에서는 2·28 사건을 40년 동안 언급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금기처럼 여겨졌다. 

28,000 무고한 시민이 정부에 의해 사망했다.


★ 1932 엘살바도르 농민 학살 


1931년 12월 공산당이 지지하고 있던 아라우호 정권을 파시스트파(派)의 장군 마르티네스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뜨렸다. 마르티네스의 보수적 독재정권은 13년간 계속되었는데, 1932년 아라우호 지지 농민 4만명이  봉기하여 서부 도시에 그들의 정권이 수립되기도 하였으나 30,000명 이상의 농민 대부분이 살해되어 진압되었다.


★제주 4 · 3 사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유혈사태이다.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 티베트 반란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이다. 


1959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이 시작되어 티베트 동부 지역에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다. 티베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 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약 30만 명의 인민해방군과 무장한 티베트인들벳군과 충돌로 86,000이 사망했고 라사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국군의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


★ La Violencia


1800 년대에 보수당과 콜롬비아의 자유 당간의 서로 대립 정치에서 자유당인사의 암살로 촉발된 폭동사태로 1948 년부터 1958 년까지 20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1946 년부터 1966 년까지는 30 만명이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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